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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송시열 유적
작성자 문화체육관광과
작성일 2018-12-03
조회수 925

우암송시열 유적

겨울, 우암송시열 유적지를 가다.

​화양구곡에 있는 우암송시열유적은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조선 4대 서원으로 손꼽을 만큼 유명했던 만동묘와 화양향교이다.

충민사

조선4대서원으로 꼽을 만큼 유명했던 화양구곡에 있는 우암송시열유적은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조선 4대 서원으로 손꼽을 만큼 유명했던 만동묘와 화양향교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의종과 신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곳으로
비석하나와 초석만 남아 있던곳을 현재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조선 성리학을 계승하고 완성한 우암 송시열의 애국사상과 중국 청나라의 무력에 굴하지 않는
민족자존 정신이 깃든 곳이며 주변에는 신도비, 암서재, 읍궁암등 화양구곡 비경이 있으며
주변 암벽에는 충효절의, 비례부동등 암각된 글도 살펴볼 수 있다.

하마비

대원군도 내리게 했다는 하마비

우암송시열 유적지는 화양구곡 2경 운영담과 3경 업궁암 과 4경 금사담을 앞에 두고 있다.
복원되었지만 서원의 흔적을 살펴볼 수있는 곳 중에 하나가 입구에 있는 하마비이다.
과거 대원군도 말을 탄채 화양서원 들어서다 유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하마비로
그 당시 화양서원의 위세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화양서원묘정비

화양서원묘정비

이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취지와 서원의 주인,
모시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한 것으로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이다.
윤봉구가 지었으며 안진경의 글자를 모아 만들었는데
서원철폐되면서 땅속에 묻힌것을 광복이후에 묘정비를 찾아서 세운것이다.

읍궁암 앞에 서원흔적

읍궁암 앞에 서원흔적

4개의 비슷한 비각은 같은 내용이라고 하는데 하나씩 없어지면 다시 만들고 해서 4개가 되었는데
다시 찾게 되면서 이렇게 한곳에 모아두게 되었다. 가장 좌측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존사청

존사청

만동묘까지 복원된 송시열 유적지의 배경 화양계곡이 유명해 것은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속에 복원된 이곳은 조선 후기 수백년간 가장
위세가 당당하였던 서원 하나가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송시열이 세상을 떠기전 제자 권상하에게 명나라 신종과 의종 두황제의
제사를 지낼 묘우를 짓기를 당부하여 전국 유림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
모화사상이 깊던 당대, 명나라 황제의 은혜을 잊지 않고 기린다는 뜻을 담은 서원 만동묘가
세워진 배경이다.원래 현판은 전방청인데 언듯보면 전사청으로 보여 잘못붙인거라는...

풍천제

풍천제

이곳은 풍천제 제간들, 고을 수령이나 관찰사들이 와서 제를 지낼때 머물렀던 곳이다.

화양사원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 (1696)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것으로 숙종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조선4대서원으로 꼽을 만큼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고종 8년 (1871)에 철페되었다.
위세도 당당했던 서원은 이제 명분만으로 그 맥을 유지하는것 같다.

만동묘정비

만동묘정비

외삼문인 양추문을 지나면 좌측에 만동묘정비가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초기에는 나라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자 고종2년(1865)에 대보단으로 모시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

1937년 위패와 제사용구는 불사르고 묘정비는 일본인들이 알아보기 힘들게 쪼개어 땅에 묻어버렸는데 1983년 괴산군에서 다시 찾아 세우고 정비한 것이다.

성공문

성공문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게 만든는 계단, 다른 곳과 달리 지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유난히 우암송시열 유적지 서원과 만동묘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고 좁다.
도저히 정면으로 못가고 자연스럽게 발을 측면으로 발끼리 교차도 못하며 합족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자연스럽게 밟을때 마다 허리를 숙이며 넘어지지 않도록 발을 보며서 걷도록 되어 예를 갖추게 만든다.

만동묘

만동묘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려 헐어지면서 만동묘에 있던 신주와 편액등은 서울 대보단의 경봉각으로
옮겼다고 한다. 괴산군 골짜기 청나라를 피해 깊숙한 산골에서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낸 건
서인의 충절과 자존심의 상징었을까?

노론사람의 중심이었던 곳, 이유야 어찌 되었던 여행을 다닐수록 송시열의 흔적은 끝도 없다.
그리고 더 알수록 재미있는 역사들,
하지만 역사보다 내 눈에 들어오는 선경은 모든것을 묻은데 평화스러움 그 자체이다.

[출처] 충청북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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