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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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웅·방성녀 씨 내외, "말리지 마! 난 일밖에 몰라...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
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
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
도 많다고.
글 소설가 박원식 bravo@etoday.co.kr, 사진 주민욱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
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
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
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
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
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
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
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
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
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
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
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
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
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
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
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
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
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
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
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
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
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
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
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
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
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
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
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
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
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
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
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
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
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
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
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
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
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
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
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
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
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
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
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
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
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
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
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
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
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
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
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
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
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
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
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
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
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
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
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
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
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
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
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
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
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
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
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
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
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
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
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
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
이다.
- 괴산군농업기술센터 | 2019-10-29 | hit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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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평에 예쁜 카페가 생겼어요~~
11월 오픈을 앞두고 있는 옥슈슈 카페 주인 권은영 김재연 을 만나고 왔다.
막연하게 서울을 떠나고 싶었던 두사람은 서울의 송파에서 빵가게
-올 어바웃 카스테라-를 운영해오던 빵쟁이다.
솜씨좋은 아내는 빵을 굽고 과일청을 담그고 커피와 과일쥬스를 만들어 낸다.
남편은 음악을 즐기며 취미로 하던 목공실력으로 가게 인테리어를 도맡아 꾸민 솜씨쟁이들이다.
햇살좋은 가게는 덕평 3거리 못미쳐 바람의 화원 촬영장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괴산에도 이런 멋진 카페가 생겨서 생각만해도 기분이 좋다.
더군다나 주인들의 인상만큼이나 커피맛이 좋다.
분위기 좋구 커피맛 좋은 카페 옥슈슈.
카페 이름도 과감하게 바꾸었다.
이지역의 옥수수를 알리기 위하여
카페에서는 빵도 만들고 체험도 할 생각이란다.
카스테라 전문점이니 선물용으로도 아주 좋다.
지나시는 길에 들러서 빵도 사고 커피도 한잔 하고 가시면 좋을듯......
삶터를 서울에서 괴산으로 옮겨왔으니
괴산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적응해가시길 ...
옥슈슈 주인장님!!
농사 지어서 사는것도 좋지만
그대들처럼
지역의 농산물을 활용해 농산물 소비를 늘리고
지역을 알리는것도 참 훌륭해
괴산대학찰옥수수의 본고장인 괴산의 옥수수로
대한민국 최고의 빵을 만들어보시게나...
일단 격하게 환영합니다!!
- 괴산군농업기술센터 | 2019-10-18 | hit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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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농원 선녀와 나뭇꾼을 만나다
청천의 가을농원에 다녀왔다.
선녀와 나뭇군을 인터뷰하러 가긴 했지만
오시는 손님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일찍 출발해서 일손을 거들고왔다.
오늘 오시는 손님들은 손홍철 가을농원의 주인 친구가 인솔해서 온 분당과 용인에서 활동중인 미술 애호가들의 모임이다.
오늘 자연에서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작품을 들고 오셨다.
안주인인 박종임님은 몇일전부터 준비해서 특별한 요리를 선보였다.
원래 향토음식 연구회 회장님으로 오랫동안 활동을 하신 분이라
사과 떡부터 사과 부각을 후식으로 준비하고
꽃차를 배우셔서 오늘은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 귀한 백련차를 내놓으셨다.
점심으로는 괴산의 유명한 버섯찌개를 준비하고
사과와 마당에서 따온 민들레로 상큼한 샐러드를
그리고 머윗대, 고사리나물, 묵은지를 볶아 부부김치를 내놓으셨는데
손님들의 감탄사로 마당이 소란스러웠다.
곳곳에 손수 만든 사과 식초, 복숭아 병조림, 사과잼을 예쁘게 병에 담아 전시하고
마당 곳곳에 안주인의 센스로 자연스러운 포토존이 만들어졌다.
이번 행사는 가을농원이 주민사업체로 참여하는 관광두레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었다.
앞으로 한달동안은 사과따기 체험이 이어진다.
한해동안 다녀가는 체험객은 대략 1000여명으로 괴산의 명소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가을농원과의 인연은 특별하다.
2000년 형부를 따라 가족여행을 왔다가 괴산에 반하고 가을농원에 반해서
2년뒤 2002년 감물로 귀농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참 인연도 신기하지....
서울에서도 대치동과 삼성동에서 테헤란로를 사이에 두고 같이 살았다.
지금은 청천과 감물에서 떨어져 살고 있지만 늘 마음은 형제처럼 자매처럼 정답고 따뜻하다.
든든한 형님 내외가 계셔서 걱정도 안하고 괴산으로 내려왔다.
괴산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과수원이지만 바지런한 안주인이 많은일을 해내고 있다.
사과는 많은 양이 직거래로 판매되고 있고
오늘도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친환경 농업대학 사과작목과반 학생들의 방문이 있었다.
남편 손홍철님은 학생들을 과수원 현장견학으로 강의하고
아내 박종임님은 체험객을 위해 동부서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아무래도 체험과 방문객이 많아서 두분이서는 힘들어 보인다.
두 아들이 있는데 서울에서 큰아들은 세프로 일하고
작은 아들은 수원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사과농사만 잘 짓는게 아니라 자식농사도 잘했다.
언젠가 이 농장을 이어받아 사과농사를 이어갈 아들은 과연 누가될까 궁금하다.
아이들이 어릴때부터 자라는 모습을 봐와서 각자 개성이 뚜렷하고 예쁜데
먼저오는 아들이 터를 잡지 않을까?
그때까지 두분의 이쁜 미소가 환하게 빛나도록 너무 무리하지말고 건강 챙기면서 일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괴산군농업기술센터 | 2019-10-17 | hit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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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랜드 이해숙을 만나다
사과와 복숭아가 주작목으로 18,000여평 드넒은 농원에
작업장과 집 체험장을 갖추고 있는 애플랜드는 친환경 유기농의 고장인
괴산군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로 가는 길목
칠성면 외사리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오향동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괴산에서 가장 높은 948m의 군자산과 괴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전경과
청정지역의 비옥한 황토땅에서
유기농 고장인 괴산군의 이미지에 걸맞는 깨끗하고 건강한 사과와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다.
귀농 8년차인 지금은 사과대학을 다니며 과수재배기술 익혀 고품질의 사과와 복숭아를 생산하고 있다.
“자연 그대로에 정성만 담았습니다”를 슬로건으로
안전한 먹거리 생산에 힘쓰고 있으며,
design요소 도입과 2,3차 산업으로의 진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애플랜드의 자원을 활용하여 치유와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체험학습장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과와 복숭아를 이용한 가양주, 식초, 천연비누와 화장품 만들기 등을 배우고
지금도 동아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직장생활의 한계와 60세가 넘어서도 할 수 있는 자기사업을 모색하던 중
지금의 애플랜드 농원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산을 개발하고 나무를 심으며 기술을 몰라 아주 힘들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광고 일을 계속하면서 주말에만 내려와 일손을 도왔기 때문에
산더미 같은 농장일은 항상 내차지였다.
그나마 오빠가 오셔서 도와주고 함께 힘든 일을 감당해 주었다.
작년부터는 다행히 남편이 아주 내려와서 농장일을 함께 하고 있다. 든든한 파트너와 함께하니 일은 반으로 줄고 능률은 두배로 늘었다. 이제부터는 체험과 힐링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설을 조성중이다.
군자산과 마을 앞으로 흐르는 괴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는
애플랜드의 장점을 살려 오토캠핑장과 체험장, 사과밭을 걸으며 산책할 수 있는 산책로를 조성중이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는 큰딸 희조가 농장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제과제빵을 배우고 푸드테라피(요리심리상담자) 자격까지 갖추고 현재는 도시에서 활동중이다.
대를 이어 농사짓고 살 수 있는 희망의 땅 애플랜드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앞으로 이 땅에서 펼쳐질 자연체험 학습장, 전통주 식초 등 농산물 가공체험을 통해
농부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애플랜드를 꿈꾼다.
- 괴산군농업기술센터 | 2019-07-31 | hit 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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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농부의 패기와 아이디어를 활용한 귀농정착
우수사례 주제명 : 청년 농부의 패기와 아이디어를 활용한 귀농정착
우수사례 주제명 : 청년 농부의 패기와 아이디어를 활용한 귀농정착
분야
우수사례 주제명 : 청년 농부의 패기와 아이디어를 활용한 귀농정착 정책별 세대별 특성별 일반 현황
유일반 현황 시도 충청북도 시군구 괴산군 성명 한승옥/이지현 연락처 귀농연도 2017 품목 표고버섯 귀농 전 거주지역 서울시 귀농 전 직업 회사원 개요
-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나, 각박한 회사생활에 지쳐 귀농을 결심하여 표고버섯을 대표 작물로 Famer4U(파머포유)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판로를 확보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귀농 3년만에 안정적인 정착을 함
- 청년창업농 등 다양한 농정시책을 활용하여, 귀농정착을 하였으며, 성공사례를 발판으로 괴산군에서 선정하는 2018년 강소농 우수 실천농가에 선정되었고 청년창업농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장관상)을 수상함.
성공요인
- 소득에 안정적인 작물을 기반으로 한 다품종 소량생산 (표고버섯+밭작물)
- 직거래 고객 관리
- 다양한 SNS를 통한 농부의 생활 공유
- 지역 내의 청년농부들과 원만한 관계 형성(4-H활동)
- 남편/아내의 책임 분담을 통한 전문성 확보(남편_생산, 아내_홍보,고객관리 등)
- 주택이 아닌 부동산(땅)을 먼저 확보하여 사업의 빠른 확장 가능 (거주는 부모님 집에서)
- 다양한 활동을 통한 자기홍보(고쿠락프리마켓 등)
정착시 애로사항 및 문제해결
- 표고버섯 생산 기반 구축 시, 시설자금이 많이 들어감
- 귀농귀촌 지원금 수요에 비하여,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적은 편이라 생각함.
- 직거래 확보 및 유지
- 농업정책과 | 2019-06-26 | hit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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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자문기관을 통한 농촌체험마을 확대 노력 귀농 멘토를...
연구자문기관을 통한 농촌체험마을 확대 노력 귀농 멘토를 통해 농사에 대해 경험 축척
전재식 씨(61년生)는 현재 약초된장을 목표로 공장 신축에 힘을 쏟고 있다.
이미 농촌 체험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는 전재식씨의 약초된장 공장은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를 늘리기 위한 노력 중에 하나다.
농촌체험마을 조성을 위해서 전재식 씨는 전통한옥식 농가숙박시설도 완공했다. 이렇게 조성된 농촌체험마을에 도시인들의 방문이 많아지고 그 도시인들을 위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전재식 씨의 목표다. 이를 위해 전문자문기관인 중원대학 식품 공학학부와의 교류를 통해 연구자문을 활용할 계획에 있다.
전재식 씨가 외부의 기관에게 이렇게 자문을 구한 것은 귀농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귀농을 결심하고 농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지만 귀농·귀촌 멘토링제를 이용했다. 귀농·귀촌 컨설팅/멘토링 사업은 농업과 관련된 전문가가 농촌 정착을 비롯해 작물 재배 등 귀농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멘토가 되어 귀농인을 도와주는 사업이었다.
"귀농을 결심하고 농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멘토링 사업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연구자문기관을 통한 농촌체험마을 확대 노력 귀농 멘토를 통해 농사에 대해 경험 축척
전재식 씨는 귀농·귀촌 컨설팅/멘토링 사업을 신청한 후 멘토로 선정된 분을 소개받았다. 멘토이 신 분은 이미 농사에 대한 경험이 10년이 넘었고 지자체로부터 신지식농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가 인복이 좋아서인지 멘토이 신 분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 분 아니었으면 지금의 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멘토를 통해서 전재식 씨는 농사의 기본부터 작물을 어떻게 재배할지, 농산물을 생산 해 어떻게 판매하고 이를 경영자답게 어떻게 운영할지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품목을 정하지도 않았지만 귀농지에 맞게 어떤 품목을 선택할지도 멘토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유통·가공분야에 대한 정보도 멘토로부터 접할 수 있어 지금의 약초된장 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기본이 되었다.
전재식 씨는 농촌에 정착해 체험마을까 지 조성하게 된 것은 귀농·귀촌 컨설팅/멘토링 사업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멘토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농 정착을 위해 다양한 제도 마련 정부의 지원제도 활용하는 것도 귀농 시작에 도움
전재식 씨는 인삼 4,500평, 천마와 천년초를 각각 2,50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이를 통해 얻어지는 출하실적이 총 1억정도가 된다. 그리고 2010년에는 2억정도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으며 약초 된장 공장을 비롯해 농촌체험마을의 농가 민박으로 인한 수입 등도 예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전재식 씨가 이렇게 많은 사업을 벌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본인만의 자금으로 진행하기보다는 각종 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각 지자체별로 농촌체험마을을 운영하거나 이와 관련된 사업을 지원하고 있어 앞으로도 지원을 받을 계획이다.
"정부에서 귀농을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어요. 어떤 제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 이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거에요."
그리고 단지 농사만 짓기보다 다양한 사업으로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농촌을 기반 으로 한 여러 활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최근에는 농촌을 방문하려는 도시인들이 많아지고 있고 웰빙이나 친환경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사업 아이템도 개발할 수 있다.
전재식 씨는 농촌도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보다 활동적인 귀농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자료 출처 : 농림수산식품부, 새싹농부! 희망을 노래하다, 2011 >
- 농업정책과 | 2019-06-20 | hit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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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은 내 마지막 직업이다
농업은 내 마지막 직업이다
용산 프로그래머, 농사를 꿈꾸다.
현재 1.5ha에서 친환경사과를 재배하고 있는 박상우 씨는 11년 전만해도 고객관리 및 무역관리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해 A/S를 도맡았던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였다. 2000년 배우자 유관순 씨와 결혼하면서 부부에게 전혀 연고가 없는 청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결혼 후 배우자에게 의류사업을 제안했고, 인천에서 옷가게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청주에서 의류사업이 괜찮다는 정보를 듣고 청주로 이사갔습니다. 저야 대부분의 거래처가 서울이었지만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유지·보수만 하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청주에서도 충분히 업무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A/S가 밀려들어오면서 박 씨는 거의 출퇴근 비슷하게 서울로 출장을 가야 했다. 이때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느끼게 된 그는 젊어서부터 계속해왔던 일을 그만두고, 배우자와 함께 옷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나 패션에는 감각이 부족했던 박 씨는 결국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옷 판매가 적성에 맞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새로운 사업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재서도 점점 커가는데, 너무 늦게 끝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농업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농사는 날이 저물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요." 현재 박 씨의 부모님은 충남 예산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다.
귀농 전까지 주말만 되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예산으로 직접 내려간 박 씨는 이때 농사에 대한 기본적인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농기계를 다루는데도 능숙했던 박 씨는 인생의 마지막 직업으로 농사를 선택한 것이다.
용산 프로그래머, 농사를 꿈꾸다
아파트 처분으로 토지 마련
2005년 귀농을 결심한 박 씨는 본격적으로 정보 수집에 나섰다. 당시 유명했던 귀농사모 카페에 가입해 작물, 지역, 농업기술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그는 귀농사모 충북 정기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정기모임에서 만난 괴산지역 회원의 사과농장을 수확철에 방문했는데, 너무 환상적이더군요.
사과농사의 가능성을 체험한 것이죠. 즉시, 괴산에서 사과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배우자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는게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상의했습니다. 평소 제 결정을 믿고 따라주었던 집사람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었습니다.
" 아파트를 처분해 얻은 2억 원으로 사과재배지를 구입하기 위해 괴산의 부동산을 쉬지 않고 찾아다닌 박씨는 문광면 옥성리에 위치한 지금의 농장에 터를 잡았다. "사과사랑 동호회와 괴산군 농업기술센터에 문의해 알아본 결과 부부 두 명이 사과를 원활하게 재배하기 위한 면적이 1.3~1.6ha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부동산을 통해 수차례 알아보던 중, 지금의 농장터를 계약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귀농을 문의하기 위해 농장에 찾아오는 분들에게는 부동산 중개업소 대신 직거래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제가 시세보다 비싸게 토지를 매입했기 때문이죠."
아파트 처분으로 토지 마련
배우자가 없었다면 귀농에 실패했다
1.5ha의 토지를 구입한 박 씨는 사과농사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떴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은 걱정이 앞섰다. 토지의 전 주인이 사과를 재배 하다 결국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밭 중앙에는 두 개의 봉분이 버티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해결할 일은 봉분의 이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을 어르신들을 통해 봉분의 주인을 수소문했죠. 그래서 이장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방치됐던 토지를 경운하고, 급한 경사를 완만하게 낮추기 위해 포클레인 두 대를 빌려 1주일간 밭의 기반조성을 마쳤습니다. 이후 사과나무 1년생 1,500주를 구입해 식재했습니다. 보통 3년생 이상의 나무부터 사과를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집에 생활비를 보태주지 못했습니다. 아마 집사람이 없었다면 저도 귀농에 실패하고 농촌을 떠났을 것입니다. 가장인 저 대신 지난 5 년간 생활비를 책임져준 집사람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박 씨가 1년생 사과나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통 묘목상에서 판매되는 묘목이 1년생이고, 판매되는 3년생 이상은 다른 밭에 심어져 있던 묘목을 뽑아서 심어야 하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면서 나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 씨는 귀농할 때 과수를 선택한다면 향후 몇 년간은 수입이 거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놔야 한다고 조언했다.
배우자가 없었다면 귀농에 실패했다
교육으로 부족한 내실을 채우다
2006년 귀농을 시작하면서 박 씨는 다양한 교육을 이수하기 시작했다. 농사에 대한 기본 지식은 있었지만, 과수 중에서도 사과에 대한 지식은 백지상태였기 때문이다.
먼저 농사에 대한 기본지식을 정립하기 위해 여주 농업경영전문학교에서 귀농교육을 이수한 뒤, 사과 사랑 동호회, 괴산군 농업기술센터 등을 통해 사과재배에 대한 전문지식을 익혔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느끼자 2009년 충북마이 스터대학 사과과정에 입학했다.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장기적인 교육을 통해 보다 전문성있는 사과재배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제 이름을 걸고 처음 시작하는 농사를 사과로 선택하고 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는 생각에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20~30년 정도 경험 있는 동기들이 30명에 달한다는 마이스터대학 사과과정에서 박 씨는 교육과정은 물론 동기들의 경험 및 정보공유 등을 통해 자신만의 재배기술을 하나, 둘 정립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교육으로 부족한 내실을 채우다
귀농 5년차, 드디어 사과를 재배하다
사실 박 씨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사과재배의 지식 및 경험부족으로 300주를 베어버린 아픔 때문이다.
"3년 전 겨울에 가뭄이 무척 심했습니다. 겨울에 무슨 관주가 필요하겠냐는 생각에 그냥 놔뒀죠. 그런데 봄이 돌아오자 300주가 동해로 고사해 절망에 빠졌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찾아가 물어보니 겨울가뭄때 관주를 해주지 않으면 겨울을 나는 동안 나무가 살기 위해 모든 영양을 소비해버려 결국 봄에 동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무지가 애꿎은 사과나무만 죽인거죠. 나무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귀농 5년차, 드디어 사과를 재배하다
사과나무를 심은지 4년이 지난 2009년. 첫 수확을 기대했지만 당시 기후에 적응된 농법을 사용하지 못해 수확에 실패한 박 씨는 마이스터대학에서 습득 한 지식과 경험을 모두 밭에 투자했다. 그 결과 지난해 18kg 컨테이너 박스 800개의 첫 사과수확을 거둘수 있었으 며, 4,000만 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1,000박스를 수확한 올해는 6,000만 원의 수익을 올리면서 그동안의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됐다. "올해로 대부분의 빚을 청산하게 되면서 이제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습니다. 아직까지 청주에서 농장으로 출퇴근했는데, 이제 내년 수입을 기초로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됐네요. 하루빨리 가족들과 함께 농촌으로 와야죠."
귀농하면서 눈만 뜨면 농장이 걱정돼서 매일 새벽같이 농장에 가야 직성이 풀린다는 박상우 씨의 성실함과 사과나무에 대한 애정이 귀농정착에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귀농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만을 가지고 하루빨리 농촌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박 씨의 사례는 철저한 준비와 성실함 없이는 귀농에 실패할 수 있다는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귀농은 환상이 아닌 현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귀농 5년차, 드디어 사과를 재배하다
<자료 출처 : 농림수산식품부, 새싹농부! 희망을 노래하다, 2011>
- 농업정책과 | 2019-06-20 | hit 1253